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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지 않는다 (전치형, 홍성욱 저, 2019. 8.) 본문
이 글은 <미래는 오지 않는다>(전치형, 홍성욱 저, 문학과 지성사, 2019. 8.)의 글을 읽고 참고한 글 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미래는 과연 오는가
미래의 의미부터 제대로 알아보면 ‘아닐 미’와 ‘올 래’가 결합된 의미이다. 즉, 미래는 앞으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데이비드 카프는 “왜 미래는 절대 도착하지 않는가”라고 물음을 가진 것도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요즘 미래 담론에서 흔히 보이는 확신, 즉 미래를 곧 일어나고야 말 객관적인 사건으로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과 주관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미래를 하나의 담론, 즉 해석과 비판과 논쟁이 필요한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 담론이 과학기술 중심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래예측의 허와 실
미래예측은 왜 곧 잘 틀리는걸까? 칼 포퍼는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으로 치부했다. 당시 과학철학은 과학의 핵심이 ‘입증’이라고 생각했다.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서 이론이 옳다는 것을 밝히는 입증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설명과 예측의 균등성을 모두 입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는데, 입증주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에 일어났던 현상을 가지고 이론을 입증하는 것이 ‘설명’이며, 미래에 일어날 현상을 가지고 이론을 입증하는 것이 ‘예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퍼는 입증주의가 철학적으로 근거가 매우 약한 도그마라는 것을 주장하며 과학의 핵심은 입증이 아니라 반증이라고 피력했다. 포퍼는 이런 과학을 열린과학이라고 하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론도 열린 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과 유토피아
기술은 세상을 바꾸는가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기술 결정론인데 기술결정론은 표출된 기술 중심의 역사관, 미래관이며, 역사의 방향, 사회 변화의 방향을 기술이 결정짓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엔지니어 등 기술적 전문가들이 전면에 나서서 사회 변화를 이끌어나가려 한 움직임이 바로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운동 또한 이러한 견지에서 출발한다.
더 나은 미래란 곧 더 좋은 기술이 나온 시대가 된다. 기술의 진보가를 곧 사회의 진보와 동일시하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기술해결사주의(technological solutionism)는 어떤 문제든 거기에 필요한 기술을 잘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실리콘밸리식 사고방식이다.
기술적 유토피아 내러티브는 사회적 진단과 전망 대신 주로 한 개인의 멋지고 편한 삶의 모습을 내세운다는 특징이 있다. 기술 중심의 미래상은 총체적인 현실이라기보다는 머리에 장치를 두르고 감상하는 가상현실의 화면과 같다. 삶의 다른 부분들이나 사회적 맥락과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술의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공하는 기술이란 무엇일까? 성공하는 기술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새롭고 더 값싼, 더 효율적인 기술이 나왔다는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도 이것이 자동적으로 기술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신기술 등장을 예측하기 힘든 세 가지 이유는 첫 째로 기술의 숨겨진 용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둘 째로 기술이 가진 다양한 용도를 고려하지 못한 것, 셋 째로 기술의 네트워크 효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성공한 기술로서의 벨의 진화이다.
기술은 언제 실패하는가
기술의 실패란 무엇이고 실패를 예측할 수 있는가? 기술의 성공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실패에서도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온다. 콩코드와 노트북, 이리듐 프로젝트, 세그웨이 등 뒷받침하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왜 뛰어난 경영자들도 종종 잘못된 판단을 할까. ‘죽음의 계곡’과 ‘다윈의 바다’를 명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의 기술개발이 이뤄져도 인간의 저항 문제가 남아있다. AT&T의 Picture Phone(1970) 프로젝트가 실패했던 사례가 증거이다.

픽처폰은 미국 AT&T에서 1970년에 개발한 세계최초의 영상전화이다. 영상통화에 대한 개념은 이미 최초로 전화기가 개발된 시점인 1870년대부터 가능성을 논의해왔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구현되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지나고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AT&T의 픽처폰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당시 뉴욕-워싱턴 DC의 사무실을 영상전화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이 픽처폰은 영상전송을 위해 기존의 통신선보다 더 비용이 큰 구리선을 사용해야 했고, 영상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연 1,200 달러를 부담해야 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중산층 평균 수입의 1/8에 해당되는 비용이었다. 결국 시장의 외면을 받아 사용자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이후 가격을 낮춰 후속 모델을 만들며 1990년에 비디오폰을 선보였으나 다시 시장에 외면을 받게 되었다.
기술적 한계와 비용부담이라는 원인도 있었지만 영상전화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의 이용습관이었다. 전화를하면서 항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부담과 불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픽처폰과 비디오폰의 실패는 사람의 사회문화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아 실패한 사례로 남게되었다. (참고 : 도입과 실패 반복한 영상전화 수난사, 오선실 강사, 사이언스타임즈, 2010. 9. 8.)
기술-미래의 예언자들
각 종교마다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은 경전이 있는 것처럼 기술-미래 담론에서도 전문가와 대중이 널리 읽고 토론하는 대표적인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연구와 제품, 또 연설이나 책을 통해 기술-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으면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다.
드렉슬러, 한스 모라벡, 마빈 민스키는 인간 진화의 역사를 바꾸어 새로운 종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의 능력을 논한다는 점에서 기술-미래 예언의 공통된 특성을 보인다. 특이점이 온다는 책을 저술한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라는 상징을 통해 예언자적, 종교적 성격을 드러낸다. 인류가 가진 문제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방법은 기술밖에 없다는 일종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기술-미래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수순이라고 강하게 전제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을 막으려는 시도는 곧 진보를 통제하는 전체주의로 평가된다.
기술-미래예언들은 모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간의 삶과 죽음의 방식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즉 기술이 인간의 조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기술-미래 예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술의 역사를 보면, 기술이란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을 끊임없이 개선하려는 의자가 발현된 것이 곧 근대 기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기술-미래 예언자들이 제시하는 전망은 기술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여기에서 기술-미래 예언의 종교적 성격이 드러난다.
지금의 기술-미래 예언의 논리는 자기계발서와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다. 첫번째는 급격한 기술-미래의 지점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전망, 두번째로 필연적인 변화를 막거나 피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진단, 세번째로 개인은 현명하게 그때를 대비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조언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기술-미래의 예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예언들의 내러티브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기술-미래 내러티브에서는 기술이 개인의 편의, 건강, 영생 등에 도움을 줄 가능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개인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기술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향상시킬까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즉, 개인을 초월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에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의미한다.
미래를 약속하는 과학기술
예측과 약속은 다르다. 예측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약속은 인간과 사화회에 대해 하는 것이다. 예측을 만드는 것은 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오래된 일이지만, 약속을 만드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런식으로 작동하는 과학을 약속하는 과학(Promissory Science)이라고 부른다. 어떤 가치나 당위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면 그것은 윤리나 정치의 영역이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의 과학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중심이 된다. 과학활동의 결과물은 ‘사실’이 아니라 ‘약속’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관심과 투자가 사기나 투기의 성격을 띠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약속과 기대라는 과학기술 발전의 결과로 생기는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전개 과정에 구조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기술-미래에 대한 약속과 기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순진한 감정이나 추상적 태도가 아니라 실재하는 힘. 가시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전략적 연구를 할 수 있는 대규모 연구비 투자를 이끌어내려면 연구 결과를 사회적, 경제적 이익으로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확산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수의 사람이 공유하는 기대는 물질적, 제도적, 인적 자원을 특정한 방향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누구의 미래인가
단지 미래 기술의 성능을 묘사하거나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기술이 사용되는 모습을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회의 관습, 문화, 구조의 문제를 기술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기술을 누가 혹은 어떤 집단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사용할지를 상상할 때 우리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젠더, 계급, 인종, 종교에 대한 통념의 영향을 받는다.
밝고 풍요로운 미래는 인기가 있고, 어둡고 갈등이 있는 미래는 주의를 끌지 못한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다가올 것 같은 미래는 인기가 있고, 다소 불편한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미래는 인기가 없다. 기후변화가 인기 없는 미래인 더 중요한 기후-미래가 주목받는 것이 힘 있는 이들의 이득에 하기 때문이다. 미래 담론들끼리의 경쟁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질 수 있다. 누가 어떤 동기로 어떤 미래를 퍼뜨리고 어떤 미래를 억압하는지 판단하려면 각종 미래상에 담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함의를 이해해야 한다.
미래 예측과 미래 담론
미래 예측의 방법론은 있을까?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퓨처 시그널(Future Signal)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미래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미래는 미래징후를 주고 오는데, 이걸 퓨처 시그널이라고 한다. 미래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힘이 있다. 이는 델파이 기법, 시나리오 기법, 교차영향 분석 기법, 추세 외삽법 등의 세부적인 유형으로도 구분될 수 있다.
그렇다면 끝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확신에 찬 얘기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 수 있으며, 그것은 미래에 대한 ‘통제권’, 즉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미래 예측은 실천 지향적이어야 하며, 그 어느 학문보다도 현재 지향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미래학’이다. 미래 예측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것일 수 있다.CEO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현재와 불편한 미래를 포용하면서도 희망을 키우고 연대를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실천을 위한 미래 시나리오 작업을 의미한다.
인문학의 역할
사람을 향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 주도되는 과학기술과 미래는 미래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나 비관, 그리고 성공과 실패 프레임을 떨쳐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책 내용 중간에서도 등장하는 문학이론가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 1912 ~ 1991)의 발언은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로부터 실제로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라
좀 더 나아진 세상, 더 좋은 세상을 꿈꾸고 이에 대한 비전을 이끌어내는 힘이 인문학에 있기 때문이다.”